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 서평

데크레센도 2025. 4. 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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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성경 영감설 서평

피터엔즈 지음, 김구원 옮김

 

필자: 왕**

 

성경해석 방법이란? 저자가 밝히는 바와 같이 겸손, 사랑, 인내(245) 이것이 저자의 주장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전제(성경에서 다양성은 배제되며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무조건 통일성이 있다)를 가지고 성경해석에 접근 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주의를 주는 부분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말이다. 우리의 전제와 우리의 닫힌 마음이 보호자가 되어야할 성경을 너무나 쉽게 보호의 대상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성경이 양립(100% 인간적이며, 100% 신적인)할 수 있는 것을 너무 한쪽(신적으로만)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지만 우리는(복음주의, 보수주의, 필자도 예장합동출신 성도이다.) 영지주의자들처럼 인간저자의 측면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역사 속(저자가 살아온, 최초의 독자가 살아온)에서 너무나 괴리시켜버리는 결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속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육신적 관점에서 읽기를 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 예로 구약성경과 고대근동문학을 비교하며, 둘째로 구약성경내의 신학적 다양성들을,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저자들의 구약성경 해석을 설명함으로 이를 논증해 간다.

필자는 저자의 논증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인간에까지 지신을 낮추어 말씀하시어 성경저자의 역사적 문맥 안에서 자신(성경저자)이 계시형태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에 동감한다.(230)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은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성경저자와 독자들이 필요에 맞게 자신을 낮추어 이야기하신다. 즉 성육신하신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의 표시이다. 역사와 문화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나님은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러한 표시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낮추어 말씀하셨다. 영어에 understand라는 단어가 분리해보자면 아래 서다이다. 그런 면에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역사 속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자리에 서서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또한 필자가 동감하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이시대의 성도들은 조직신학의 혜택을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성경의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무시하거나 쉽게 통합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논증하는 것처럼 분명 성경의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에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신학적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한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추상적인 개념의 차원에서는 분명 잘못된 것 없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접근하거나 적용”(114)할 때 욥이 친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잘못된 전제를 가진 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 시킬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역동적으로 살아 다양성을 제시하고 있는 성경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동감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역사 속에서 그들의 가치관에서는 용납되었던 것을 나의 사고 지금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해석법을 가지고 그들을 제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해석법이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여행하는 여정, 우리가 함께하는 순례 길로”(232) 걸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봉사자로 동참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데 59page의 논의 중에 왕정시대의 명확한 역사적 증거가 원역사의 객관적 진실성을 증명한다는 것에서 왕정시대에 대한 성경 기록의 역사성을 뒷받침하는 성경 외적인 증거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러한 증거가 없는 원역사와 족장사에 대한 성경 기록의 역사성까지 역소급하여 인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논증이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전혀 가능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틀렸다는 역사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그것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증거에 의해서 옳다고 인정될 수는 없는 것인가? 필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로 71page의 논의 중 창세기의 이야기는 처음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하였으나, B.C. 1,000년 이후 어떤 시점에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문자로 기록되었다.”라는 것이다. 무엇에 근거해서 인가? 상형문자나 아니면 벽화나 다른 초기 형태의 의사전달법에 의해서 그것이 번역되어지거나 아니면 특별계시의 가능성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인가? 너무 획일적으로 역사적 발전단계를 적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셋째로 열 가지 재앙에 대한 page 141에서 출애굽 때의 재앙은 애굽에 신들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본문에서 그러한 경우는 12:12의 경우뿐이고 이는 마지막재앙에 해당될 뿐이다. 많은 경우는 여호와에 대한 앎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12:12의 경우도 장자에 집중되어 있다고 본다면 출 4:22-23의 경우 애굽의 신보다는 이스라엘을 장자로 여기신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를 친 것으로 보이며 여리고 성의 라합의(2:10) 경우도 10가지 재앙보다는 홍해 사건에 더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저자가 논증하는 것에 이러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큰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논증에 필자도 거의 동감하고 있으며 저자를 통해 새로운 통찰과 성경해석방법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본인이 가지고 있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적정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신앙하는 자에 대한 겸손을 요구하는 책이다. 우리의 마음을 넓게 열고 우리의 전제를 뒤로하고 성경 속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역사 속에 성육신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절실한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성경을 그 시대적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끽하라는 것이며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며 여정을 떠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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